TSTF Magazine Issue 093 · Column 2026 · September · 18
Issue 093 — Signal

"외주사가 AI를 쓴다면
굳이 외주를 맡길 이유가 없다"

9월 7일, 한 게임 프로젝트의 음악 외주 계약서에 문장 하나가 새로 들어갔다. "AI를 쓸 거면 미리 말하라"는 조항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을 자세히 보면, 정작 그 조항이 지키라고 요구하는 대상은 외주사만이 아니라 발주사 자신의 계산이기도 했다.

사람이 없는 녹음실 라이브룸. 뚜껑을 연 그랜드피아노와 그 끝에 놓인 작은 외장 드라이브 위로, 높은 창에서 들어온 빛줄기가 비스듬히 지나간다
Cover · Issue 093 "계약서 한 줄이, 누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를 바꿔놓았다." TSTF MAG · 2026
Signal

§ 01계약서에 들어온 한 줄

9월 7일, 머니투데이 김평화 기자가 게임음악 외주 계약서에 새로 들어간 조항 하나를 보도했다. 생성형 AI를 쓸 경우 발주사와 미리 협의해야 하고, AI 산출물에 저작권 문제가 생기면 외주사가 책임진다는 내용이었다.

찾아보니 AI를 쓰지 않는 건 게임음악 업계에서 오랫동안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불문율이 계약 조건으로 명시된 사례는 이번처럼 드물었다. 말로만 지키던 규칙이 서명해야 하는 문장으로 바뀐 셈이다.

이런 조항이 새로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보도된 사례처럼 대놓고 계약서 문장으로 박제된 경우는 드물었다. 그동안은 발주사와 외주사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지, 서명란 옆에 인쇄된 조건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외주사가 AI를 쓴다면 굳이 외주를 맡길 이유가 없다. 우리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A게임사 관계자 · 머니투데이, 2026.09.07

이 한 문장이 이번 호가 붙잡은 지점이다. 조항의 표면은 저작권 문제고, 그 밑에는 발주사가 이미 끝낸 계산이 하나 깔려 있다. 이번 호는 그 계산을 발주사와 외주사, 양쪽 당사자의 눈으로 따라가 본다.

§ 02발주사의 계산법

같은 관계자는 왜 외주를 주는지도 함께 말했다.

"외주를 주는 건 특정 작곡가의 색깔과 프로젝트에 맞춘 수정 능력이 필요해서다."

— A게임사 관계자 · 머니투데이, 2026.09.07

이 두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계약서 조항의 성격이 달라 보인다. 첫 문장은 "AI를 쓰면 곤란하다"가 아니라 "AI를 쓸 정도면 우리도 직접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외주를 주는 이유였던 그 사람만의 색깔과 수정 능력이, AI 앞에서는 더 이상 외주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동안 외주 계약은 결과물을 받고 돈을 지불하는 단순한 거래처럼 보였다. 이 조항 하나가 그 거래에 새로운 조건 하나를 끼워 넣었다.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먼저 밝히라는 조건이다. 이건 예술적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발주사가 나중에 떠안을지 모르는 법적 책임을 외주사에게 미리 넘기는 절차이기도 하다.

이 조항이 의미하는 건 결국 신뢰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발주사가 외주사의 실력을 믿고 맡겼다면, 이제는 그 실력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확인하려 든다.

당신 팀에도 외주사에 일을 맡기거나, 반대로 외주를 받아 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조항을 처음 받아든 외주사 담당자라면 계약서를 한 번 더 읽어봤을 것이다. 그 관계를 지금까지는 결과물의 품질로만 따졌다면, 이 계약서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 03변호사가 본 1년

이 흐름이 한국 게임음악 계약서만의 일은 아니다. GamesRadar+와 PC Gamer가 지난달 보도한 바에 따르면, 게임 전문 변호사 Haley MacLean(Voyer Law)은 자신의 고객 거의 전부가 개발·퍼블리싱 계약에 생성형 AI 금지 조항을 넣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이런 소송 리스크는 감수할 가치가 없다(it's not worth the legal liability)"고 표현했고, 2~3년 전만 해도 간헐적이던 이 조항이 지난 1년 사이 계약서 상당수로 번져 이제는 "그냥 표준 문구(just boilerplate)"가 됐다고 덧붙였다.

Numbers

§ 04절반값과, 흔들리지 않은 것

머니투데이가 다음 날인 9월 8일 이어서 보도한 수치는 이렇다. AI를 쓰면 게임음악 제작비가 기존의 절반도 들지 않는다. AIVA, Suno, Udio 같은 해외 도구는 물론, NC AI가 내놓은 '바르코 사운드(Barco Sound)'까지 이미 나와 있다.

이번 호를 준비하며 처음엔 이 수치 하나로 외주 시장이 곧 흔들릴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같은 기사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 오현석 책임연구원은 "아직 생성형 AI 도입에 따른 고용 변화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읽고 짐작을 접었다. 제작비와 고용은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숫자였다.

가격이 내려간 도구와,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재는 셈이다.

§ 05증명해야 할 것이 바뀌었다

스팀은 개발 과정에서 AI 도구로 만든 아트·코드·음향을 '사전 생성 AI 콘텐츠'로 분류하고, 개발사가 그 사용 내용을 설명하게 한다. 미리 고지하지 않으면 출시가 늦어지거나 저작권 분쟁에 걸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발주사는 외주 작곡가에게 점점 더 구체적인 걸 요구하는 처지가 된다. 어떤 AI 도구를 어느 단계에서 썼는지, 그 결과물이 최종 곡에 얼마나 반영됐는지, 작업 기록과 원본을 남겨뒀는지까지 설명받아야 한다.

우리 데스크에서는 이번 계약서 조항의 진짜 목적이 작곡가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고 본다. 발주사 자신의 저작권 리스크를 줄이려는 계산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대체 가능성 계산이 같은 문장 안에 같이 들어와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외주사가 증명해야 할 대상이 결과물에서 제작 과정으로 옮겨갔다.

외주를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이제 같은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다음에 계약서를 받아 든다면, 그 안에 있는 건 저작권 조항이 아니라 협상의 조건일 수 있다. 작업 기록이 계약서만큼 중요해진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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