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TF Magazine Issue 089  ·  Column 2026 · September · 14
이번 호 · 결정과 갈등

AI를 쓰기 전에
한 번 더 앉는 자리.

협약 한 줄이 회의실 풍경을 바꿨다. 도구를 들이는 결정이 팀장 한 사람의 판단에서, 노사가 마주 앉는 절차 위로 옮겨갔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그룹의 실루엣
Cover · Issue 089 표결 결과가 나온 다음 날에도, 회의실 의자는 그대로 두 줄로 놓여 있었다.
§ 01

표 하나가 만든 새 아침

2026년 9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노동자들이 첫 단체협약에 표를 던졌다. 적용 대상은 약 1,900명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산하로 들어간 뒤 처음 맺는 협약이라, 통과 소식은 게임업계 노조 뉴스치고는 드물게 크게 번졌다. 인수 뒤 첫 협약이라는 자리는, 앞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산하 다른 스튜디오가 노조를 맺을 때도 참고할 만한 선례로 남는다.

"노동자에게 더 큰 힘이 생기는 지금이, 블리자드에는 새로운 하루다. 그 힘은 플레이어를 위한 더 혁신적인 게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 클로드 커밍스 주니어(Claude Cummings, Jr.) · CWA(Communications Workers of America) 회장 · 비준 발표 원문: "It's a new day at Blizzard, where greater power for workers is translating into more innovative games for players."

협약이 성명서 한 장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건 숫자에서 드러난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교섭 기간은 2년. 서명 한 장 뒤에 이만한 시간이 쌓여 있었다는 뜻이다.

해고를 통보받은 노동자에게는 14개월 동안 공석이 생기면 돌아올 수 있는 재고용권이 붙었다. 해고가 곧 끝이 아니라, 일 년 넘게 문이 열려 있는 상태로 바뀐 셈이다. 근속 기간과 무관하게 퇴직수당 4주치가 추가된 조항도 마찬가지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오래 일한 사람을 가르지 않았다.

주 3일 출근하는 하이브리드 근무 조항도 함께 담겼다. 재택과 출근을 오가는 방식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고, 협약 문서 안에 숫자로 박아 넣었다는 점이 이번 조항들의 공통점이다.

§ 02

협의·평가·교섭, 세 동사가 들어간 자리

이번 호가 눈여겨보는 대목은 임금이나 근무 형태가 아니다. 협약 안에 들어간 AI 조항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작업에 실질적 영향을 주는 AI를 들이기 전에, 노조와 협의하고 평가하고 교섭해야 한다. 보도에 쓰인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discuss, evaluate, and bargain"이다. 노조와 먼저 논의하지 않은 채 AI로 직무를 자동화하거나 대체할 수는 없다.

이 세 동사는 수사가 아니라 협약 문구다. 조항을 읽으면서 편집부가 떠올린 건 "이 도구 괜찮아 보이던데 한번 붙여볼까"로 시작하던 흔한 회의 풍경이었다. 그 회의에 이제 노조 대표가 함께 앉는다.

협약이 정한 절차에는 순서가 있다. 노조와 마주 앉는 자리를 먼저 통과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순서를 건너뛰고 도구부터 배치하는 쪽은 이제 막혔다. 결과가 아니라 순서 자체가 협약이 손댄 지점이다.

조항이 걸리는 기준도 좁지 않다. 작업에 "실질적 영향"을 주는 AI라면 대상이 된다는 말은, 특정 부서나 직군으로 범위를 한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협약 밖에서 슬쩍 도구를 붙이는 경로를 좁혀놓은 셈이다.

§ 03

우리 데스크에서 본 것

우리 데스크에서는 이 조항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엔 협상 결과로 읽었고, 다시 읽었을 때는 "누가 이 방에 앉는가"라는 질문으로 읽혔다. 같은 문장이 두 번째에는 다르게 보였다.

§ 04

088호, 087호와 나란히 놓아보면

지난 호(088)에서는 한 스튜디오가 들였던 도구를 스스로 도로 내려놓는 장면을 다뤘다. 그 결정은 회사 혼자 내렸다. 마주 앉을 상대가 없었다.

그 전 호(087)는 제출 폼의 고지 칸을 다뤘다. 도구를 이미 쓰고 난 뒤, 출하 직전에 체크하는 서류였다.

이번 조항은 그 앞이다. 도구를 쓰기로 정하기 전에 노조가 테이블에 앉아 "협의·평가·교섭"이라는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결정이 놓인 자리가 팀장의 재량에서 협약이 정한 절차 위로 옮겨간 셈이다.

088호와 087호를 나란히 놓으면 순서가 보인다. 087호는 쓰고 난 뒤의 고지였고, 088호는 쓰고 난 뒤의 철회였다. 이번 089호는 쓰기 전 단계를 다룬다. 같은 주제를 세 번 다른 시점에서 통과한 셈이다.

088호를 쓸 때는 이 흐름을 회사의 자체 판단으로만 봤다. 이번 자료를 보고 나니, 그 판단 위에도 절차가 하나 얹힐 수 있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다. 세 호를 이어 붙이면, 도구를 둘러싼 결정이 회사 안 한 사람의 몫에서 여러 당사자가 나눠 쥐는 몫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드러난다.

§ 05

편집부가 보는 쪽

편집부는 이 조항을 노동자의 일방적 승리로만 읽지 않는다. 회의실에 의자가 하나 늘었다는 사실로 읽는다. 늘어난 의자가 무엇을 바꿀지는 다음 교섭에서 드러날 문제다.

자리가 느는 것과 결정권 자체가 바뀌는 것은 다른 얘기다. 이번 조항이 손에 쥔 건 "결정 전에 앉을 자리"이지, 결정을 뒤집을 권한은 아니다. 그 차이를 가볍게 보지 않으려 한다. 다음 교섭에서 그 자리가 무엇으로 쓰이는지를 다시 확인할 문제로 남겨둔다.

당신 팀에도 이런 회의가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 방에 앉을 권리를 협약으로 못 박은 팀과, 여전히 팀장 한 사람의 재량에 맡긴 팀이 나뉘어 있을 뿐이다.

블리자드의 이번 조항이 정답은 아니다. 다만 그 방에 누가 앉을지를 미리 정해뒀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 질문을 뒤로 미루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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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088
쓰던 도구를 도로 내려놓은 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