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TF Magazine Issue 050  ·  Column 2026 · July · 06
Issue 050 — The Read

캐릭터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게 되면.

예전엔 캐릭터의 대사를 한 줄씩 다 적어 두었다. 정해진 스무 마디 안에서만 말했다. 그런데 이제 캐릭터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무슨 말이든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대사를 다 쓰는 일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새로 써야 하는가.

빈 무대 위 텅 빈 흰 가면들과 바닥에 그어진 경계선
Cover · Issue 050 "말은 무한해졌는데, 그 말이 서 있을 자리는 누가 그리는가." TSTF MAG · 2026
§ 01  —  Signal

대사창이
비어 있던 자리.

예전 방식은 단순했다. 캐릭터가 할 수 있는 말을 전부 미리 적어 두고,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만 고를 수 있었다.

상점 주인은 정해진 인사말 세 개, 협박 대사 두 개, 작별 인사 한 개를 순서대로 반복했다. 선택지를 눌러도 나오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신 그 안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사고가 나지 않았다. 누가 몇 번을 클릭해도, 캐릭터는 미리 검수받은 스무 마디 중 하나만 뱉었다.

대사를 다 쓰는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말의 울타리를 세우는 노동이 새로 생겼다.

— 편집부 관찰 · 2026.07

지금은 다르다. 캐릭터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무슨 말이든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플레이어가 아무 말이나 걸어도 캐릭터가 그럴듯하게 받아친다. 정해진 스무 마디 안이 아니라, 사실상 무한한 말의 공간 안에서 캐릭터가 움직인다.

Note 여기서 사라진 건 대사를 한 줄씩 손으로 적는 노동이다. 하지만 그 노동이 없어진 게 끝이 아니다. 그 자리엔 캐릭터가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어디서부터는 안 되는지를 미리 그려두는 전혀 다른 노동이 들어섰다.

중요한 건 이걸 상실로 읽지 않는 것이다. "대사 쓰는 일이 없어진다"가 아니라, 작가가 쓰는 대상이 대사 한 줄에서 규칙과 세계관으로 옮겨 간다는 이야기다.

§ 02  —  The Read

무엇을 새로
써야 하는가.

여기서 흔한 오해가 하나 있다. "이제 작가가 필요 없어진다"는 식의 한탄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얘기의 축이 다르다. 작가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작가가 쓰는 것의 종류가 바뀐다는 게 핵심이다.

01

대사 대신, 로어 바이블을 쓴다.

캐릭터가 즉석으로 말을 만들려면 무언가를 참고해야 한다. 이 캐릭터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말투를 쓰는지, 가족이나 소속 세력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이걸 문서로 정리하는 일이 이제 대사를 한 줄씩 적던 자리를 대신한다. 잘 짜인 자료가 있어야 캐릭터가 즉흥적으로 말해도 "그 캐릭터답게" 말한다.

02

대사 대신, 허용선을 쓴다.

캐릭터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이든 하면 안 되는 순간도 함께 생겼다는 뜻이다. 이 캐릭터가 절대 언급하면 안 되는 주제, 절대 넘지 않아야 할 표현의 선, 플레이어가 아무리 몰아붙여도 흔들리지 않아야 할 태도. 이걸 미리 설계해 두는 일이 새 대본이 됐다. 예전엔 그 선을 넘는 대사 자체를 안 적으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선을 넘지 않도록 미리 울타리를 세워야 한다.

03

대사 대신, 책임의 자리를 쓴다.

캐릭터가 즉석으로 만든 말이 이상하게 튀었을 때,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대사를 한 줄씩 적던 시절엔 명확했다. 그 대사를 쓴 사람 것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캐릭터가 그 순간 스스로 지어낸 말인데, 그 말이 세상에 나가는 순간 플레이어는 여전히 "게임이 그렇게 말했다"고 받아들인다. 이 책임을 어디에 배치할지 미리 정해두는 일도 이제 작가의 몫이 됐다.

§ 03  —  Another Lens

플레이어는 언제나
선을 넘어 본다.

NPC가 무슨 말이든 받아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플레이어는 반드시 그 한계를 시험한다. 이건 나쁜 의도가 아니라 게임하는 사람의 본능에 가깝다. 상점 주인에게 정치 이야기를 걸어 보고, 마을 아이에게 험한 말을 던져 보고, 경비병에게 자신이 범죄자라고 대놓고 실토해 본다.

캐릭터를 떠보며 선을 넘기려는 시도는 언제나 있다. 그 시도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대신 그 시도가 왔을 때 캐릭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게임의 신뢰를 좌우한다.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뱉으면 몰입이 깨지고, 너무 뻣뻣하게 거부하면 캐릭터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사라진다.

Note 여기서 필요한 건 캐릭터의 성격·세계관 자료를 곁에 두고 참고하게 하는 방식이다. 캐릭터가 "이 마을의 경비병"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상 밖의 질문에 그럴듯하게 받아치도록, 참고할 자료를 얼마나 촘촘하게 짜 두느냐가 관건이다.

선을 넘으려는 시도는 위협이 아니라 신호로 볼 수도 있다. 플레이어가 이 캐릭터를 진짜 존재하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신호를 받아낼 울타리를 우리가 미리 세워 뒀느냐다.

§ 04  —  If True

경계가 새 대본이
된다면, 무엇이 달라지나.

이 관찰이 맞다면, 대사 쓰기 대신 경계 설계가 중심에 서는 순간 따라오는 것들이 있다.

  • 대본 문서의 형태가 바뀐다. 지금까지 시나리오 문서는 "A가 이렇게 말하면 B가 이렇게 답한다"는 흐름표였다. 이제는 "이 캐릭터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주제는 절대 안 되고, 이럴 땐 이런 태도를 유지한다"는 규칙집에 가까워진다.
  • "캐릭터다움"이 새로운 품질 기준이 된다. 예전엔 대사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품질이었다. 지금은 수백 번 다른 질문을 던져도 그 캐릭터가 한결같이 그 캐릭터로 남아 있는지가 품질이 된다.
  • 테스트의 방식이 달라진다. 예전엔 미리 쓴 대사를 하나씩 읽고 오탈자와 어색함을 확인하면 됐다. 지금은 사람이 일부러 캐릭터를 떠보며 선을 넘기려 시도하고, 그 반응을 검수하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 사고가 났을 때의 대응 절차가 생긴다. 캐릭터가 엉뚱한 말을 뱉었을 때 누가 먼저 알아채고, 누가 판단하고, 누가 고칠지 — 이 흐름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면 사고가 나는 순간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 05  —  For Us

게임 만드는
우리 자리에서.

즉석으로 말하는 NPC를 우리 손으로 넣는 순간, 이 질문들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을 하나에 NPC 열 명을 즉석 대화로 채운다면, 그 열 명 각각의 로어 바이블을 누가 쓸 것인가. 허용 주제와 금지 주제의 목록은 캐릭터마다 다르게 짜야 하는가, 아니면 세계관 전체에 공통 규칙을 둘 것인가. 이 작업량은 대사를 한 줄씩 적던 시절과 비교해 결코 작지 않다.

플레이어가 라이브 서비스 중에 캐릭터를 떠보며 선을 넘기려는 시도는 매일 일어날 것이다. 그 순간 캐릭터가 뱉은 말이 커뮤니티에 캡처되어 퍼졌을 때, 그 책임을 기획이 질지 개발이 질지 운영이 질지는 지금 우리 조직 안에서도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이 캐릭터다움"을 지키는 일은 이제 원화나 시나리오 한 파트만의 일이 아니게 됐다.

§ 06  —  So, You

토론의 씨앗.

이번 호의 결론은 처방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긴다. 점심 자리에서 한 번쯤 꺼내보길 바란다.

Q1

우리 캐릭터에게 허용/금지 주제를 정한다면 누가 정해야 하나?

시나리오 작가가 정할 일인가, 아니면 기획·개발·운영이 함께 정해야 할 규칙인가. 캐릭터마다 다른 기준을 둘 필요가 있을까?

Q2

캐릭터가 엉뚱한 말을 했을 때 책임은 누구 것인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진 말인데도 "게임이 한 말"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책임을 미리 어디에 배치해 둬야 할까?

Q3

무한한 즉흥 속에서 "이 캐릭터다움"을 어떻게 지키나?

대사 한 줄 한 줄을 검수하던 방식이 안 통한다면, 캐릭터의 일관성을 확인하는 새로운 방법은 무엇이어야 할까?

§ 07  —  Editor's Note

편집자 주.

이번 호를 준비하며 편집부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결국 작가의 일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쪽과 "아니,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 생긴 것"이라는 쪽. 대사를 한 줄씩 적는 일은 분명 줄어든다. 하지만 그 줄어든 자리에 로어 바이블을 쓰고, 허용선을 긋고, 책임의 소재를 정하는 일이 고스란히 새로 들어앉는 걸 보면, 일이 줄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더 어려운 부분은 따로 있었다. 예전엔 대사를 다 써 놓고 나면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은 캐릭터를 세상에 풀어놓은 뒤에도 계속 지켜봐야 한다. 무한한 자유를 준 채로 그 캐릭터다움을 잃지 않게 붙잡는 일 — 이게 새로운 종류의 솜씨라면, 아직 우리는 이 솜씨의 이름도, 이 솜씨를 잘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우리가 캐릭터에게 자유를 줄 때, 그 자유의 울타리는 누가 어디에 세우고 누가 지키는가 — 이번 호는 그 질문 앞에 멈춰 선다.

— Desk γ
Previously  —  지난 호
Issue 049
직무기술서에 없는 일

AI가 지운 자리가 아니라 새로 생겼는데 이름도 예산도 없는 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