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린트가 끝나면 우리는 회고를 연다. 잘한 것, 못한 것, 다음에 할 것. 칸은 매번 채워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채워지는 건 칸뿐이고 바뀌는 건 없다. 의례가 된 반성은 학습인가, 학습했다는 기록인가.
회고가 끝나면 문서 하나가 남는다. 칸마다 글이 들어차 있고, 형식은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런데 다음 스프린트가 와도, 지난번에 적어둔 그 문제가 거의 똑같이 되돌아온다.
"회고록은 매번 채워진다. 그런데 매번 같은 문제가 다시 올라온다. 우리가 적은 건 반성인가, 반성했다는 기록인가."
— 이번 호를 시작하게 한 문장 · 편집부 메모편집 노트 이 호는 037호 AI 의견에 서명하는 법과 결이 닿는다. 037호가 한 번의 판단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면, 이 호는 매번 남기는 기록이 어느새 판단을 대신해버리는 자리를 본다. 둘 다 무언가를 적는 행위지만, 한쪽은 책임을 남기고 다른 한쪽은 책임을 미룬다.
회고는 원래 바꾸기 위해 돌아보는 자리였다. 그런데 돌아보는 행위가 의례가 되면, 돌아봤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이 된다. 칸을 다 채우면 마음이 놓이고, 문서를 닫으면 일이 끝난 것 같다. 이번 호는 그 안도감을 한 번 의심해 본다.
회고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보는 일은 좋은 팀이 하는 일이 맞다. 문제는 그 좋은 일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형식이 되고, 형식이 어느새 알맹이를 밀어낼 때 생긴다. 그 미끄러짐을 네 조각으로 본다.
문서를 닫는 순간 묘한 안도가 온다. 적었으니 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적힌 것과 움직인 것은 다르다. 반성을 글로 옮기는 일과, 다음 주에 실제로 다르게 일하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강이 있다. 회고록은 그 강을 건넌 증거가 아니라, 건너려고 마음먹은 흔적일 뿐이다.
템플릿이 깔끔하고 칸이 잘 나뉘어 있으면, 채우는 것만으로 일을 한 것처럼 보인다. 요즘은 그 칸을 거의 자동으로 채워주기까지 한다. 스프린트 기록을 넣으면 매끈한 요약이 뚝 떨어진다. 빠르고,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매끈할수록 아무도 아프지 않다. 아무도 아프지 않은 회고는,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회고다.
변화는 대개 듣기 싫은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이 방식은 사실 우리한테 안 맞았다", "그 결정은 내가 밀어붙인 게 컸다" 같은 말들. 의례가 되면 이런 말이 제일 먼저 사라진다. 좋은 게 좋은 문장으로 칸이 채워지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주에 같은 문제가 그대로 온다.
회고가 잘 돌아가는지 보고 싶다면, 회고록을 펼치지 말고 지난 회고의 문제를 보라. 그게 이번에도 또 올라왔는지를 보면 된다. 기록은 매주 늘어나는데 반복은 줄지 않는다면, 그 회고는 학습이 아니라 알리바이에 가깝다. 돌아봤다는 사실로 안 바뀐 책임을 덮고 있는 셈이다.
같은 회고라는 이름 아래, 사실 성격이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칸을 채우는 일이고, 하나는 다음을 바꾸는 일이다. 둘은 겉모습이 거의 똑같아서, 잘 보지 않으면 구별이 안 된다. 나란히 놓고 보면 어디서 갈라지는지가 조금 또렷해진다.
| 채우는 회고 | 바꾸는 회고 | |
|---|---|---|
| 목적 | 칸을 빠짐없이 채운다 | 다음 한 가지를 바꾼다 |
| 끝나는 순간 | 문서를 닫는다 | 할 일이 하나 생긴다 |
| 잘됐다는 표시 | 빠짐없이 적혔다 | 다음 주에 덜 반복된다 |
| 불편한 말 | 매끄럽게 지워진다 |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간다 |
| 남는 것 | 기록의 더미 | 바뀐 습관 하나 |
오른쪽이 옳고 왼쪽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바쁠 때는 채우는 회고라도 하는 편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 다만 우리가 매주 어느 쪽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채우고 있으면서 바꾸고 있다고 믿는 순간, 같은 문제는 조용히 다음 주로 넘어간다.
"회고의 진짜 성적표는 문서가 아니라 다음 스프린트"라는 각도를 잠시 받아들이면, 몇 가지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현장에도 매번 여는 회고가 여러 자리에 있다. 그 자리들이 채우는 회고로 굳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씩 의심해 보면 좋겠다.
회고록을 한 줄 줄이는 대신, 지난번 액션 하나가 정말 됐는지부터 확인해 보자. 그 한 번의 확인이, 다음 회고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바꾸는 일로 되돌려 놓는다.
이번 호의 결론을 당신에게 미룬다. 점심 자리에서 한 번쯤 꺼내보길 바라는 질문들이다.
없다면, 그건 문제가 어려워서인가, 아니면 적기만 하고 아무도 다시 안 봐서인가? 둘은 전혀 다른 처방을 부른다.
회의 시간의 대부분이 무엇을 적느냐에 쓰인다면, 정작 무엇을 바꿀지에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매주 돌아보는 건 그 문제인가, 아니면 회고라는 의례 자체인가? 그 둘을 가르는 선은 어디인가?
이 호를 준비하면서 가장 조심한 건, 자칫 "회고 같은 거 다 부질없다"는 이야기로 읽히는 것이었다. 그건 정반대다. 돌아보는 일은 여전히 좋은 팀의 습관이고, 우리는 그 습관을 더 오래 지키고 싶다. 다만 좋은 습관일수록 의례로 굳기 쉽다는 것도 사실이다.
칸이 채워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이제는 손을 거의 대지 않아도 회고 문서가 그럴듯하게 완성된다. 그래서 오히려, 그 매끈한 문서 뒤에서 무엇이 실제로 바뀌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하는 책임은 더 커졌다고 본다.
그러니 다음 회고에서는 칸 하나를 비워두더라도, 지난번에 적은 것 가운데 딱 하나가 정말 달라졌는지부터 확인해 보면 좋겠다. 그 작은 확인이, 회고를 기록에서 학습으로 다시 돌려놓는다.
당신의 팀이 매주 채우는 그 문서는, 지금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아니면, 바꿨다는 느낌만 남기고 닫히는가.
— Desk γAI의 판단을 받아들이거나 물릴 때, 그 결정에 이름을 남기는 일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