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TF Magazine Issue 038  ·  Column 2026 · June · 18
Issue 038 — Column

회고가
형식이
되어버릴 때.

스프린트가 끝나면 우리는 회고를 연다. 잘한 것, 못한 것, 다음에 할 것. 칸은 매번 채워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채워지는 건 칸뿐이고 바뀌는 건 없다. 의례가 된 반성은 학습인가, 학습했다는 기록인가.

똑같은 모양의 메모지가 벽을 빼곡히 덮은 채, 한낮의 빛 아래 색이 바래 있다
Cover · Issue 038 "똑같이 적어 붙이기를 여러 번 — 벽은 가득 찼는데,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TSTF MAG · 2026
§ 01  —  Signal

칸은 채워지는데
판은 그대로다.

회고가 끝나면 문서 하나가 남는다. 칸마다 글이 들어차 있고, 형식은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런데 다음 스프린트가 와도, 지난번에 적어둔 그 문제가 거의 똑같이 되돌아온다.

"회고록은 매번 채워진다. 그런데 매번 같은 문제가 다시 올라온다. 우리가 적은 건 반성인가, 반성했다는 기록인가."

— 이번 호를 시작하게 한 문장 · 편집부 메모

편집 노트 이 호는 037호 AI 의견에 서명하는 법과 결이 닿는다. 037호가 한 번의 판단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면, 이 호는 매번 남기는 기록이 어느새 판단을 대신해버리는 자리를 본다. 둘 다 무언가를 적는 행위지만, 한쪽은 책임을 남기고 다른 한쪽은 책임을 미룬다.

회고는 원래 바꾸기 위해 돌아보는 자리였다. 그런데 돌아보는 행위가 의례가 되면, 돌아봤다는 사실 자체가 목적이 된다. 칸을 다 채우면 마음이 놓이고, 문서를 닫으면 일이 끝난 것 같다. 이번 호는 그 안도감을 한 번 의심해 본다.

§ 02  —  The Read

돌아보는 일에도
함정이 있다.

회고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보는 일은 좋은 팀이 하는 일이 맞다. 문제는 그 좋은 일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형식이 되고, 형식이 어느새 알맹이를 밀어낼 때 생긴다. 그 미끄러짐을 네 조각으로 본다.

01

회고가 끝났다는 게 바뀌었다는 뜻은 아니다.

문서를 닫는 순간 묘한 안도가 온다. 적었으니 했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적힌 것과 움직인 것은 다르다. 반성을 글로 옮기는 일과, 다음 주에 실제로 다르게 일하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강이 있다. 회고록은 그 강을 건넌 증거가 아니라, 건너려고 마음먹은 흔적일 뿐이다.

02

형식이 좋을수록 빈 회고를 숨기기 쉽다.

템플릿이 깔끔하고 칸이 잘 나뉘어 있으면, 채우는 것만으로 일을 한 것처럼 보인다. 요즘은 그 칸을 거의 자동으로 채워주기까지 한다. 스프린트 기록을 넣으면 매끈한 요약이 뚝 떨어진다. 빠르고,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매끈할수록 아무도 아프지 않다. 아무도 아프지 않은 회고는,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회고다.

03

진짜로 바뀌려면 누군가 불편한 말을 꺼내야 한다.

변화는 대개 듣기 싫은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이 방식은 사실 우리한테 안 맞았다", "그 결정은 내가 밀어붙인 게 컸다" 같은 말들. 의례가 되면 이런 말이 제일 먼저 사라진다. 좋은 게 좋은 문장으로 칸이 채워지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주에 같은 문제가 그대로 온다.

04

같은 문제가 되돌아오는 게 진짜 신호다.

회고가 잘 돌아가는지 보고 싶다면, 회고록을 펼치지 말고 지난 회고의 문제를 보라. 그게 이번에도 또 올라왔는지를 보면 된다. 기록은 매주 늘어나는데 반복은 줄지 않는다면, 그 회고는 학습이 아니라 알리바이에 가깝다. 돌아봤다는 사실로 안 바뀐 책임을 덮고 있는 셈이다.

§ 03  —  Another Lens

채우는 회고와
바꾸는 회고.

같은 회고라는 이름 아래, 사실 성격이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칸을 채우는 일이고, 하나는 다음을 바꾸는 일이다. 둘은 겉모습이 거의 똑같아서, 잘 보지 않으면 구별이 안 된다. 나란히 놓고 보면 어디서 갈라지는지가 조금 또렷해진다.

채우는 회고 바꾸는 회고
목적 칸을 빠짐없이 채운다 다음 한 가지를 바꾼다
끝나는 순간 문서를 닫는다 할 일이 하나 생긴다
잘됐다는 표시 빠짐없이 적혔다 다음 주에 덜 반복된다
불편한 말 매끄럽게 지워진다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간다
남는 것 기록의 더미 바뀐 습관 하나

오른쪽이 옳고 왼쪽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바쁠 때는 채우는 회고라도 하는 편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 다만 우리가 매주 어느 쪽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채우고 있으면서 바꾸고 있다고 믿는 순간, 같은 문제는 조용히 다음 주로 넘어간다.

§ 04  —  If True

이 각도가 맞다면,
무엇을 바꾸나.

"회고의 진짜 성적표는 문서가 아니라 다음 스프린트"라는 각도를 잠시 받아들이면, 몇 가지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 회고의 성공은 회고록이 아니라 다음 주에 측정된다. 오늘 얼마나 잘 적었는지가 아니라, 지난번에 적은 것이 이번에 정말 줄었는지가 기준이 된다.
  • 칸을 줄여도 된다. 다섯 칸을 다 채우는 것보다, 한 칸을 정해 실제로 바꾸는 편이 낫다. 못 바꿀 것까지 적어두면, 안 지킨 약속만 매주 쌓인다.
  • 자동으로 채워진 요약은 결론이 아니라 재료다. 매끈한 요약은 출발선이지 도착선이 아니다. 그 요약 뒤에 있는 불편한 한 줄은 여전히 사람이 꺼내야 한다.
  • 같은 문제가 반복되면, 회고 방식 자체를 회고하라. 문제가 안 풀리는 게 아니라 회고가 안 도는 것일 수 있다. 가끔은 무엇을 돌아볼지가 아니라, 어떻게 돌아볼지를 바꿔야 한다.
§ 05  —  For Us

게임 만드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현장에도 매번 여는 회고가 여러 자리에 있다. 그 자리들이 채우는 회고로 굳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씩 의심해 보면 좋겠다.

  • 스프린트 회고. 잘한 것, 아쉬운 것, 다음 액션 세 칸 중에서 유독 액션 칸만 매번 비어 있거나, 적혀도 다음 주에 아무도 다시 안 본다면 — 우리는 돌아본 게 아니라 돌아본 양식을 채운 것이다.
  • 라이브 장애 포스트모템. 타임라인은 갈수록 또렷해지는데 "다음에 안 그러려면"이 매번 비슷한 문장으로 닫힌다면, 기록이 좋아진 만큼 재발이 줄었는지를 같이 봐야 한다.
  • 출시 회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멋진 회고 문서가 남는다. 그런데 다음 프로젝트에서 같은 실수가 또 나온다면, 그 문서는 읽히는 자산이 아니라 닫히는 의식이었던 셈이다.
  • 자동으로 받아 적는 회고. 채널 로그를 넣으면 깔끔한 회고 초안이 나온다. 그 매끈함이 "우리 이미 충분히 돌아봤다"는 착각을 만든다면, 편해진 만큼 무뎌진 자리도 같이 생긴 것이다.

회고록을 한 줄 줄이는 대신, 지난번 액션 하나가 정말 됐는지부터 확인해 보자. 그 한 번의 확인이, 다음 회고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바꾸는 일로 되돌려 놓는다.

§ 06  —  So, You

토론의 씨앗.

이번 호의 결론을 당신에게 미룬다. 점심 자리에서 한 번쯤 꺼내보길 바라는 질문들이다.

Q1

지난 회고에서 적은 액션 중, 이번 주에 정말 바뀐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없다면, 그건 문제가 어려워서인가, 아니면 적기만 하고 아무도 다시 안 봐서인가? 둘은 전혀 다른 처방을 부른다.

Q2

우리 회고는 칸을 채우는 데 시간을 쓰는가, 하나를 바꾸는 데 쓰는가?

회의 시간의 대부분이 무엇을 적느냐에 쓰인다면, 정작 무엇을 바꿀지에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Q3

같은 문제가 회고록에 반복해서 올라온 적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매주 돌아보는 건 그 문제인가, 아니면 회고라는 의례 자체인가? 그 둘을 가르는 선은 어디인가?

§ 07  —  Editor's Note

편집자 주.

이 호를 준비하면서 가장 조심한 건, 자칫 "회고 같은 거 다 부질없다"는 이야기로 읽히는 것이었다. 그건 정반대다. 돌아보는 일은 여전히 좋은 팀의 습관이고, 우리는 그 습관을 더 오래 지키고 싶다. 다만 좋은 습관일수록 의례로 굳기 쉽다는 것도 사실이다.

칸이 채워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이제는 손을 거의 대지 않아도 회고 문서가 그럴듯하게 완성된다. 그래서 오히려, 그 매끈한 문서 뒤에서 무엇이 실제로 바뀌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하는 책임은 더 커졌다고 본다.

그러니 다음 회고에서는 칸 하나를 비워두더라도, 지난번에 적은 것 가운데 딱 하나가 정말 달라졌는지부터 확인해 보면 좋겠다. 그 작은 확인이, 회고를 기록에서 학습으로 다시 돌려놓는다.

당신의 팀이 매주 채우는 그 문서는, 지금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아니면, 바꿨다는 느낌만 남기고 닫히는가.

— Desk γ
Previously  —  지난 호
Issue 037
AI 의견에 서명하는 법

AI의 판단을 받아들이거나 물릴 때, 그 결정에 이름을 남기는 일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