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에서는 기계의 소견을 받아들일 때도, 물리칠 때도 절차가 있다. 우리는 매일 수십 번 받아들이고 물리치면서, 아무것도 적지 않는다.
어떤 판독실에는 오래된 규칙이 하나 있다. 화면 속 영상 한 장 앞에서 기계가 먼저 소견을 내면,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친다.
받아들이면 그대로 넘어간다. 물리칠 때는 이유를 한 줄 적게 한다. 두 사람의 눈이 끝내 엇갈리면, 세 번째 눈을 부른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방에서는 그게 규칙이다.
흥미로운 건 이 규칙이 무엇을 막으려 하느냐다. 기계의 답을 무조건 따르는 것도, 무조건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규칙이 붙잡으려는 건 그 사이의 한순간 — 받아들일지 물리칠지를 정하는 바로 그 손끝이다.
기계가 늘 맞으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문제는 기계가 틀린 답을 자신 있게 내밀 때다.
한 연구에서 이런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화면에 또렷한 소견이 떠 있을 때, 그게 틀린 소견이면 사람의 판단도 함께 끌려 내려갔다. 경력이 적은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오래 본 사람도, 평소라면 한눈에 잡아냈을 것을 놓쳤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옆에서 누가 또렷한 목소리로 "이건 이거다" 하고 말하면, 내 흐릿한 직감은 자리를 비켜준다. 더 또렷한 쪽이 이긴다. 그 또렷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나중 문제다.
그래서 그 방의 규칙은 사람을 의심하기 전에 또렷함을 먼저 의심한다. 받아들이는 순간을 일부러 한 박자 늦춘다.
더 깊은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람이 기계의 답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물리쳤다는 사실을 끝내 적지 않는 경우다.
왜 안 적을까. 적는 게 귀찮아서만은 아니다. 적는 순간 그건 내 판단이 된다. 나중에 기계가 맞은 걸로 드러나면, 그 한 줄은 내가 틀렸다는 증거로 남는다.
그러니 차라리 아무것도 안 적는 편이 안전하다. 받아들이면 기계 뒤에 숨을 수 있고, 물리치면 혼자 책임을 진다. 이 작은 차이가 사람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쪽으로 민다.
"받아들이면 기계 뒤에 숨을 수 있고,
물리치면 혼자 책임을 진다."
그래서 그 방은 물리치는 일을 외롭지 않게 만들려 한다. 이유를 적는 건 변명이 아니라 절차다. 모두가 적으니, 누구의 한 줄도 혼자 튀지 않는다.
그 방에는 손끝을 받쳐주는 장치가 몇 가지 더 있다.
핵심은 이 장치들이 개인의 용기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용감한 사람만 물리치고 적는 게 아니라, 방의 구조가 그걸 당연한 일로 만든다.
그런데도 현장의 솔직한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규칙이 있어도, 물리친 이유를 끝까지 또박또박 남기는 자리는 의외로 드물다. 왜 물리쳤는가라는 한 줄이, 가장 자주 비어 있다.
여기까지는 먼 방의 이야기다. 그런데 거울에 비춰보면, 우리 책상이 보인다.
우리도 매일 기계의 답을 받는다. 코드 한 조각, 문장 한 줄, 기획의 가지 하나. 받아들일지 물리칠지를 하루에도 수십 번 정한다. 다만 우리에겐 그 방의 규칙이 없다.
우리 일에선 영상 한 장이 곧바로 사람을 다치게 하진 않는다. 그래서 절차도 느슨하다. 하지만 받아들인 것과 물리친 것이 아무 데도 남지 않으면, 반년 뒤 우리는 왜 그때 그렇게 정했는지를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 글은 "이제부터 다 적자"는 처방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규칙을 하나 더 만드는 건 쉽고, 그게 또 하나의 빈칸으로 남기도 쉽다.
대신 한 가지만 같이 들여다보고 싶다. 우리는 기계의 답을 받아들일 때보다 물리칠 때 더 외롭다. 그 외로움이, 물리친 이유를 적지 않게 만든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왜 기록을 안 하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질문은 이쪽에 더 가깝다 — 우리 팀에서 기계의 답을 물리치는 일은, 지금 외로운 일인가 아닌가.
— Desk γ되돌리는 결정이 남긴 데이터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