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 하나에 밤사이 수백 장이 쌓여 있다. 사람이 그린 것, 기계가 뽑은 것, 그 둘이 섞인 것 — 겉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하나 열어 보며 무엇을 통과시킬지 정하는 자리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에 감수대 앞에 앉으면 폴더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 사이에 쌓인 이미지들이다.
섬네일을 하나씩 넘긴다. 어떤 건 손으로 한 획 한 획 그은 티가 난다. 어떤 건 몇 초 만에 뽑혀 나온 티가 난다. 그리고 상당수는 그 둘의 경계가 애매하다. 기계가 초안을 뽑고 사람이 손을 얹은 것, 사람이 그리다가 막힌 부분만 기계에 맡긴 것. 어제까지는 "누가 그렸나"를 구분하는 게 중요했다면, 오늘은 그 질문 자체가 무뎌졌다.
대신 다른 질문이 남는다. 이걸 빌드에 넣어도 되는가. 누가 그렸는지보다, 지금 화면에 뜬 이 한 장이 우리 게임의 톤과 규칙에 맞는가가 먼저다. 그 판단을 매일 아침 반복하는 자리가 감수대다.
예전에는 원화 한 장을 열면 그린 사람의 이름과 스타일이 먼저 보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밤사이 쌓인 폴더 안에서, 내부 인력이 그린 것과 외주가 그린 것과 기계가 뽑은 것이 같은 크기의 썸네일로 나란히 정렬돼 있다. 구분해 달라고 요청해도 답이 애매할 때가 많다. 초안은 기계가, 손질은 사람이, 마무리 색은 다시 기계가 거쳤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감수대에서 통용되는 원칙은 단순해졌다. 어디서 왔는지와 상관없이, 같은 기준으로 본다. 내부에서 그렸든 외주에서 넘어왔든 기계가 뽑았든, 감수 창구를 통과하는 순간부터는 똑같은 잣대로 열어 보고 똑같은 이유로 반려한다. 출처를 봐주는 예외는 없다.
이 규칙이 생긴 이유는 간단하다. 기계가 뽑은 이미지는 빠르지만, 우리 게임만의 표정과 비율, 색감의 미묘한 습관까지는 담지 못한다. 그 마지막 한 뼘을 채우는 게 사람 손이다. 그 손질이 있어야만 "이건 우리 게임 그림이다"라고 부를 수 있다.
썸네일을 넘기다 손이 멈추는 순간이 있다. 통과와 반려 사이, 애매한 구간이다.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다만 우리 게임 속 다른 캐릭터들과 나란히 놓았을 때 미묘하게 튄다. 팔다리 비율이 아주 조금 다르거나, 표정의 결이 다른 그림에 비해 과장돼 있거나.
이럴 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기준이다. 이 그림이 처음 기획 의도에 맞는가, 우리 게임의 스타일을 벗어나지 않는가, 그리고 화면에 놓였을 때 크기나 색감 같은 눈에 보이는 조건을 지키는가 — 감수대에서 반려 여부를 가를 때 실제로 짚어보는 세 가지 축이다. 이 셋 중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면 통과, 하나라도 걸리면 반려로 기운다.
재미있는 건, 이 세 축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기계가 뽑은 그림도 이 기준을 통과하면 남고, 사람이 공들여 그린 그림도 기준에서 어긋나면 반려된다. 그림의 출신보다 그림이 지금 화면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지가 먼저 온다.
진짜 일이 줄어든 게 아니라, 옮겨갔다. 그리는 노동이 있던 자리에 통과시키는 판단이 새로 들어섰다.
— 감수대 현장 노트반려를 누르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반려 옆에는 반드시 이유를 적는 칸이 있다. "비율이 안 맞음"이라고만 적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고, "다른 캐릭터 대비 팔 길이 과장, 기획 의도인 날렵한 인상과 어긋남"이라고 구체적으로 적는 사람도 있다. 후자가 압도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
이 노트들은 한 곳에 모인다. 그리고 모인 노트는 다시 세 갈래로 정리된다. 원래 의도를 벗어났다는 지적, 우리 게임 스타일에서 벗어났다는 지적, 눈으로 잴 수 있는 조건에서 벗어났다는 지적. 이 세 갈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노트는 되돌려 보내진다.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반려는 여기선 통하지 않는다.
"이거 왜 반려하셨어요?" "저 캐릭터 눈매가 원래 설정보다 날카로워요. 우리 쪽 톤은 좀 더 순한 인상인데." "기계가 뽑은 초안이라 그런가요?" "그거랑 상관없어요. 사람이 그렸어도 똑같이 반려했을 거예요."
노트를 남기는 일은 귀찮다. 한 줄로 끝낼 수 있는 걸 세 줄로 늘리는 셈이니까. 하지만 이 노트들이 쌓이면 다음에 비슷한 그림이 들어왔을 때 판단이 훨씬 빨라진다. 노트는 그날의 기록이면서, 다음 사람을 위한 지도이기도 하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검토해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한 명으로 좁혀진다. 여러 의견이 갈릴 때 최종 결정을 내리는 자리, 감수대에서는 그 자리를 오너라고 부른다. 오너가 도장을 찍으면 그 그림은 빌드에 들어가고, 도장이 없으면 아무리 마감이 급해도 들어가지 못한다.
이 구조가 번거로워 보일 수도 있다. 왜 굳이 한 명에게 몰아주는가. 답은 간단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거슬러 올라갈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이 출시 후에 문제가 됐을 때, "이건 누가 통과시켰나"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사람의 애매한 합의로 넘어간 그림은 그 질문에 답할 사람이 없다.
기획 단계 그림, 형태만 잡은 초기 모델, 색과 질감이 입혀진 단계, 그리고 최종본 — 이렇게 굵직한 고비마다 이 확인 절차를 한 번씩 거친다. 고비를 하나 넘길 때마다 되돌리는 비용이 커지기 때문에, 앞 단계에서 걸러낼수록 뒤가 편해진다. 오너는 그 모든 고비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다.
내부에서 그린 것이든, 외주에서 넘어온 것이든, 기계가 뽑은 것이든 — 이 오너 앞에서는 출신이 지워진다.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을 공개해야 하며 어떻게 확인할지가 미리 정해져 있어야, 외주와의 협업도 속도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굴러간다. 그 신뢰의 마지막 지점이 오너의 도장이다.
저녁이 되면 오늘 통과된 그림들이 빌드에 반영된다. 화면 안에서는 그 그림이 누구 손을 거쳐 왔는지 티가 나지 않는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렸는지, 기계가 뽑고 사람이 손질했는지, 겉모습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달라진 건 그리는 손이 아니라 책임의 자리다. 예전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 그림의 주인이었다. 지금은 그림을 통과시킨 사람이 그 그림의 주인이 된다. 만드는 일에서 통과시키고 책임지는 일로, 무게가 조금씩 옮겨가고 있다.
이게 나쁜 이야기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종류의 솜씨가 여기서 생겨나고 있다는 건 짚어둘 만하다. 무엇을 통과시킬지 알아보는 눈, 반려 이유를 남에게도 이해되게 적는 손, 그리고 그 판단에 이름을 걸 수 있는 배짱. 그리는 솜씨와는 다른 결의 솜씨다.
오늘 우리 빌드에 들어간 것들 중, "내가 통과시켰다"고 이름 적을 수 있는 건 몇이나 되는가. 폴더를 닫기 전에,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이다.
지난 호에서는 답이 이미 주어진 자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