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TF Magazine Issue 024  ·  Column 2026 · May · 21
Issue 024 — The Read

베테랑은
왜 문서를
안 쓰는가.

팀 안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문서를 안 남긴다. 경험이 쌓일수록 기록보다 판단이 앞서고, 그 판단의 근거는 머릿속에만 있다.

오래된 노트와 빈 페이지들이 놓인 창가 책상,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장면
Cover · Issue 024 "오래된 서랍 안엔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가득하다." TSTF MAG · 2026
§ 01  —  Signal

이번 호가
시작된 장면.

어느 팀에서 10년 경력의 기획자가 팀을 떠났다. 한 달 뒤, 그가 관리하던 수치 구조에서 이상한 패턴이 발견됐다.

누군가 이유를 찾으려 했다. 위키에는 결과만 있었다. 왜 그 수치가 그렇게 설계됐는지는 아무 데도 없었다. 결국 팀은 같은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했다. 여섯 주가 걸렸다.

이 이야기의 악당은 없다. 그 기획자가 게으른 사람도 아니었고, 팀이 문서화를 싫어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가 빠졌다 — 가장 중요한 판단들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분은 문서를 안 쓰는 게 아니에요. 쓸 필요를 못 느끼는 거예요.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 현장에서 들은 말

이 말이 이번 호의 출발점이다. 베테랑이 문서를 안 쓰는 건 귀찮아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문서화는 불필요한 번역처럼 느껴진다. 이미 아는 것을 굳이 언어로 옮겨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AI가 문서 초안을 대신 써주는 지금, 이 공백은 채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더 보이지 않게 덮이고 있는가.

§ 02  —  The Read

베테랑이 쓰지 않는
네 가지 이유.

문서화를 "안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은 다르다. 대부분의 베테랑은 쓸 능력이 있다. 그러나 쓰지 않는다. 그 이유를 네 조각으로 나눠본다.

01

경험이 판단을 앞선다.

수십 가지 케이스를 겪은 사람은 새 케이스를 보는 순간 답이 보인다. 추론 과정 없이 결론에 닿는다. 그 결론을 문서로 남기려면 이미 자동화된 과정을 다시 풀어야 한다. 피아노를 오래 친 사람에게 "손가락이 왜 그 건반으로 움직였나요?"를 설명하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지만, 언어로 꺼내기가 어렵다.

02

문서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고 느낀다.

자기가 이미 아는 내용을 굳이 쓰는 사람은 없다. 문서는 항상 "아직 오지 않은 누군가"를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 누군가는 추상적이고, 지금 눈앞의 마감은 구체적이다. 이 불균형이 매번 우선순위 싸움에서 문서화를 진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 다음 합류자가 얼마나 오래 헤매는지는, 그 자리에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손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록의 이유를 설득하기란 어렵다.

03

모르는 상태를 기억하지 못한다.

한 번 알고 나면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기가 불가능해진다. 어느 수준에서 설명을 시작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쓰더라도 — 신입에게는 너무 압축되어 있고, 베테랑에게는 너무 당연한 문서가 나온다.

이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이 많을수록 더 심해지는, 구조적인 함정이다.

04

AI 초안이 공백을 가린다.

지금 AI는 문서를 잘 만든다. 배경을 설명하고, 목차를 잡고, 문장을 다듬는다. 표면은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이 결정을 했나"는 여전히 담기지 않는다. AI가 쓸 수 있는 건 주어진 정보 안에서만이고, 베테랑의 머릿속에 있는 근거는 여전히 입력되지 않았다.

공백이 채워진 게 아니라 덮인 것이다. 깔끔하게 포장된 빈 상자처럼.

§ 03  —  Another Lens

형식지와 암묵지 —
AI는 어느 쪽을 다루는가.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있는 것 — 형식지. 몸으로 체화되어 있어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 — 암묵지.

문서화가 어려운 이유는,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이 대부분 암묵지이기 때문이다. "이 수치가 왜 이래야 하는가", "이 케이스에서 왜 이 판단을 했는가" — 이것들은 경험으로 쌓인 것이라, 언어로 꺼내는 순간 뭔가 빠진다는 느낌이 든다.

형식지 암묵지
정의 말과 글로 전달 가능한 지식 경험으로 체화된, 설명하기 어려운 지식
예시 프로세스 문서, 매뉴얼, 티켓 판단의 근거, 패턴 인식, 직관
AI의 역할 잘 정리하고, 빠르게 확장한다 주어지지 않으면 다룰 수 없다
이전 방법 문서 작성, 위키 편집 함께 일하기, 반복 관찰, 도제식 학습
위험 갱신 없이 구식이 됨 사람이 떠나면 사라진다

AI는 형식지를 다루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암묵지는 여전히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 "AI가 문서를 써준다"는 말은, 형식지의 포장을 더 빠르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 안에 담겨야 할 암묵지는 — 여전히 누군가 꺼내줘야 한다.

Note 이것은 나쁜 뜻이 아니다. 빈 형식도 없는 것보다 낫다. 다만 "AI가 해결해준다"는 믿음이 생기면, 실제 암묵지 이전 노력이 줄어들 수 있다. 형식은 있는데 내용이 없는 문서가 늘어나는 역설.

§ 04  —  If True

베테랑이 떠나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이 구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결과가 달리 보인다.

  • 사람이 아니라 인프라가 사라진다. 베테랑이 떠날 때 팀은 "숙련자 한 명"을 잃는 게 아니다. 수년에 걸쳐 쌓인 보이지 않는 결정의 구조가 함께 사라진다. 다음 사람이 그것을 재건하려면 또 수년이 필요하다.
  • 신입의 실패는 예고된 것이다. 새로 합류한 사람이 "왜?"를 물어봐도 정확한 답이 없다. 문서는 있지만 근거가 없다. 결국 직접 부딪혀 보면서 배울 수밖에 없다 — 이건 신입의 무능이 아니라, 시스템의 설계 결함이다.
  • 팀 기억이 짧아진다. 구성원이 바뀔수록 집단 기억이 리셋된다. "우리가 왜 이걸 이렇게 만들었지?"라는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팀은 — 과거에서 배울 수 없는 팀이다. 같은 실수가 몇 년 간격으로 반복된다.
  • AI가 이 문제를 더 안 보이게 만든다. 베테랑이 AI로 초안을 뚝딱 만들어내면, 팀은 "기록됐다"고 믿는다. 실제로 담긴 게 무엇인지는 확인하지 않는다. 기록이 있으니 괜찮다는 안심이, 공백을 더 오래 방치하게 만든다.
§ 05  —  For Us

게임 개발 현장에서
이게 보이는 곳.

이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다. 기획 쪽에서 "이 수치는 어떻게 잡은 거야?"라고 물었을 때 아무도 모르는 순간. QA 쪽에서 "이 케이스는 왜 통과시키는 거야?"가 문서에 없어서 매번 다시 판단하게 되는 경우. PM 쪽에서 오래된 기능의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이 팀에 딱 한 명뿐인 상황.

이 패턴에서 반복되는 공통점이 있다.

  • 기준을 만든 사람과 기준을 쓰는 사람이 다르다. 그 기준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는 만든 사람 머릿속에 있고, 쓰는 사람은 결과만 본다. 기준이 상황에 맞지 않아도 근거를 모르면 고칠 수도 없다.
  • 암묵지는 도제식으로만 이전된다. 옆에 앉아서 보고, 물어보고, 함께 시도하는 과정이 유일하게 효과 있는 방법인데 — 원격 환경이 늘수록, 팀이 커질수록 이 채널이 좁아진다.
  • 설명하기 귀찮은 게 아니라,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진입점을 모르면 아예 안 하게 된다.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진입 장벽의 문제다. 그 장벽을 낮추는 게, AI가 실제로 도울 수 있는 자리일 수 있다.
§ 06  —  So, You

토론의 씨앗.

이번 호의 결론을 당신에게 미룬다. 점심 자리에서 한 번쯤 꺼내보길 바라는 질문들이다.

Q1

당신 팀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문서를 안 남기는 사람이기도 한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시간의 문제인가, 필요를 못 느끼는 문제인가, 아니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인가?

Q2

AI로 만든 문서가 "기록됐다"는 착시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형식은 완성됐는데 내용이 비어 있는 문서가 팀에 있지는 않은가? 그 문서가 실제로 누군가를 도운 적이 있는가?

Q3

베테랑이 팀을 떠날 때, 어떤 것이 함께 사라지는지 팀이 알고 있는가?

그 손실이 느껴지는 시점은 언제인가? 그리고 그 시점이 너무 늦지는 않은가?

§ 07  —  Editor's Note

편집자 주.

이 주제를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기획·QA·PM 할 것 없이 현장에서 반복되는 패턴인데, 누구도 이걸 "문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원래 그런 거야", "구두로 배우면 돼", "그 사람한테 물어봐" — 그렇게 처리되다가, 그 사람이 없어지면 그때야 비로소 문제가 된다.

베테랑이 문서를 안 쓰는 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문서화가 이득이 되지 않는 구조의 문제다. 쓰는 사람이 얻는 것보다 나중에 읽는 사람이 얻는 게 훨씬 크다. 이 불균형이 바뀌지 않으면 — 도구가 아무리 좋아져도 공백은 남는다.

AI가 문서 초안을 써주는 시대는, 어떻게 보면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이기도 하다. "어떻게 쓰느냐"의 진입 장벽이 낮아지면, "쓸 마음이 생기는 조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다만 그 기회를 잡으려면 — 기록이 있으니 됐다는 착각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공백은 채워지지 않았다. 다만 더 깔끔하게 포장됐을 뿐이다.

— Desk γ
Previously  —  지난 호
Issue 023
결정은 기록되는가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이 조직의 다음 행동에 실제로 연결되는 방식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