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TF Magazine Issue 009  ·  Column 2026 · April · 24
Column  ·  Game Design

"기획서"
여전히
사람이 쓰는가

AI가 아트를 그리고, 코드를 짜고, 텍스트를 완성하는 시대.
그런데 기획이라는 일의 무게중심은 어디로 이동했는가.

게임 기획서를 손으로 써 내려가는 장면 — 의도와 맥락을 붙잡고 있는 사람의 손
Cover · Issue 009 게임 기획서를 손으로 써 내려가는 장면 — 의도와 맥락을 붙잡고 있는 사람의 손
§ 01  ·  Signal

기획이라는 일이
바뀌고 있다

AI는 이미 게임 개발 현장 깊숙이 들어와 있다. 콘셉트 아트의 초안을 그리고, 캐릭터 대사를 수십 개씩 뽑아내고, 레벨 구조를 제안하고, 코드를 완성해준다. 개발자와 아티스트들은 "AI 덕분에 반복 작업이 줄었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그런데 기획 직군에서는 같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기획서는 AI가 써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현장에서 쓰인 기획서의 결정적인 부분들은 여전히 사람이 쓰고 있다. 왜일까. 이번 호는 그 이유를 살펴본다.

§ 02  ·  The Read

기획서가 담는
세 가지

기획서는 문서가 아니다. 기획서는 결정이다. 어떤 게임을 만들 것인가, 왜 이 기능이 필요한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 이 모든 선택의 기록이 기획서 안에 담긴다. AI는 그 문서의 형태를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기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01  ·  Intent

의도를 쥐는 것

AI는 "무엇을 만들지"는 잘 도와준다. 프롬프트를 주면 퀘스트 구조를 만들고, 보스 패턴을 제안하고, UI 플로우를 그린다. 하지만 "왜 이걸 만드는가"는 다르다.

이 퀘스트가 왜 지금 이 타이밍에 필요한가. 이 보스 패턴이 플레이어에게 어떤 감정을 줘야 하는가. 이 UI가 어떤 유저 행동을 유도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 기획서는 그 답을 꺼내 문서로 만드는 행위다.

AI는 "어떻게"를 잘 안다. "왜"는 아직 우리의 몫이다.

— TSTF Magazine · Issue 009
02  ·  Context

맥락을 아는 것

AI는 우리 팀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이번 스프린트에 어떤 기술 부채가 쌓였는지, 팀장이 어떤 방향으로 제품을 가져가고 싶어 하는지, 지난 플레이테스트에서 어떤 피드백이 나왔는지.

기획서는 이 모든 맥락 위에서 쓰인다. 같은 기능이라도 팀의 상황과 제품의 방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설계된다. 그 맥락을 읽는 사람이 기획서를 쓴다. AI가 아무리 좋은 초안을 만들어줘도, 그 맥락을 채워 넣는 건 기획자의 몫이다.

03  ·  Trade-off

트레이드오프를 선택하는 것

기획의 본질은 선택이다. 재미와 밸런스 사이에서, 개발 기간과 완성도 사이에서, 코어 유저와 신규 유저 사이에서 — 기획서는 이 선택들의 집합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AI는 여러 옵션을 나열해줄 수 있지만,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한 척 보이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주체가 없다. 트레이드오프를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 03  ·  Another Lens

두 개의
칼럼

AI가 기획 일에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AI를 잘 쓰는 기획자는 반복 작업에서 벗어나 더 중요한 결정에 집중할 수 있다.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을 직접 쥐어야 하는지, 그 경계를 아는 것이 지금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이다.

영역 AI가 잘 도와주는 것 사람이 반드시 쥐어야 하는 것
초안 작성 빠른 초안 생성, 형식 완성 의도 결정 — 왜 이 기획인가
내용 정리 정보 요약, 구조화, 문서 정돈 우선순위 판단 — 무엇이 더 중요한가
아이디어 확장 다양한 옵션 나열, 레퍼런스 탐색 방향 선택 — 어디로 갈 것인가
맥락 파악 일반적인 유저 조사, 시장 분석 우리 팀·제품·유저 커뮤니티의 맥락
리스크 검토 일반적인 리스크 목록 생성 트레이드오프 선택과 책임
피드백 반영 내용 재구성, 표현 다듬기 어떤 피드백을 수용할지 판단

표의 오른쪽 칼럼은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게 아니라, AI가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모양은 만들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선택의 무게는 만들 수 없다.

§ 04  ·  If True

이게 맞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기획서를 여전히 사람이 써야 한다는 말은, 기획 직군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획자의 역할이 더 선명해진다.

반복적인 문서 작성, 형식 맞추기, 초안 정리 — 이 일들은 AI가 상당 부분 흡수한다. 기획자에게 남는 건 더 핵심적인 것들이다. 왜 만드는가를 정의하는 일. 팀과 제품의 맥락을 읽는 일. 선택의 순간에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일.

이 세 가지는 AI가 보조할 수 없는 영역이다. 기획자의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를 불안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읽으면 기회이기도 하다 —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 했던 진짜 기획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할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더 선명해지는 것이다.

— TSTF Magazine · Issue 009
§ 05  ·  For Us

게임 개발 현장에서
무슨 의미인가

게임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퀘스트를 왜 만드는가"다. 이 질문을 AI에게 던지는 건 의미가 없다. AI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게 우리 게임에 맞는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이 퀘스트의 초안을 만드는 것, 비슷한 게임의 퀘스트 구조를 조사하는 것, 여러 버전의 텍스트를 뽑아보는 것 — 이런 작업에는 AI를 적극 써야 한다.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결정에 더 집중할 수 있다.

현장에서 AI를 잘 쓰는 기획자와 그렇지 않은 기획자의 차이는, 얼마나 많이 쓰느냐가 아니다. 어디에 쓰고 어디에서 직접 결정하느냐를 아는 것이 차이다.

§ 06  ·  So, You

토론의
씨앗

아래 세 질문을 팀과 함께 꺼내보세요.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대답이 다를수록 더 좋은 대화가 됩니다.

Q1  ·  지난 일주일

당신이 쓴 기획서에서, AI가 대신할 수 없었던 결정은 무엇이었는가?

그 결정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AI에게 맡겼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Q2  ·  변명과 설명

"AI가 초안을 썼으니까"가 변명이 되는 상황과, 설명이 되는 상황의 차이는?

두 상황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 팀에서는 어느 쪽이 더 자주 일어나는가.

Q3  ·  팀 안의 사람

우리 팀에서 기획서의 "의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역량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Previously — 지난 호
Issue 008
첫 번째 초안을 누가 쓰는가

초안 작성자가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에 관하여.

§ 07  ·  Editor's Note

Desk γ의
편집자 주

기획서를 여전히 사람이 쓰는 이유를 찾다 보니, 결국 "왜"라는 질문이 핵심이었다. AI는 "어떻게"를 잘 안다. 형식을 만들고, 옵션을 나열하고, 문장을 다듬는 일에는 이미 탁월하다.

그런데 "왜 이 게임을 만드는가", "왜 이 기능이 지금 필요한가" — 이 질문의 답은 데이터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팀이 어디에 있고, 제품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가진 것이다. 그 앎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

기획서를 쓰는 행위가 여전히 사람의 몫인 이유는, 거기에 결정이 담기기 때문이다. 결정은 책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책임은 아직 사람만이 질 수 있다.

— Desk γ, TSTF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