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 품질을 지우는 시대의 잔존(殘存)에 대하여.
AI 도구를 쓰는 쪽과 만드는 쪽 사이의 거리에 대하여.
팀 안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AI를 쓰기 시작하면서 결과물의 양은 많아지는데, 퀄리티는 낮아지고 있어. 너무 많다 보니 "관리가 안 돼."
간결하지만, 이 문장 안에 꽤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작업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관리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만들어진 것이 팀 안에 남지 않는다는 문제다.
AI가 일상 도구가 된 뒤, 팀의 생산량은 눈에 띄게 늘었다. 아이디어 초안, 기획 문서, 코드 조각, 이미지,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 한 달에 만들어지는 산출물의 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많아졌다. 그런데 그 중에서 다음 달에도 팀 안에서 다시 꺼내 쓰이는 것은 몇 개인가.
이 질문을 처음 던졌을 때, 잠시 멈추게 됐다. 생산량이 10배가 되면 잔존량도 10배가 될 것이라고 막연히 가정하고 있었는데 —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팀 안의 목소리가 먼저 짚어줬다.
만들어진 것의 숫자가 늘어도,
남는 것의 숫자는 따라서 늘지 않는다.
이게 단순히 "AI 결과물의 품질이 낮다"는 이야기라면 쉽다. 도구를 더 잘 쓰면 된다. 프롬프트를 다듬으면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이 가리키는 것은 조금 다르다. 생산량과 잔존량이 분리되는 현상 그 자체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보자. 위에서 쏟아지는 모래의 양이 늘어난다고, 아래에 쌓이는 양이 그만큼 늘지는 않는다. 바닥의 크기가 같다면, 모래는 그냥 흘러넘친다. 지금 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것과 비슷하다.
AI 도구가 생산 속도를 높여준 것은 맞다. 한 시간에 10개의 초안을 뽑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팀의 흡수 능력은 그대로다. 하루에 읽고 판단하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산출물이 쌓일수록, 팀은 정작 무엇이 좋은 건지 고르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한 달에 100개의 문서를 만든 사람과 3개를 만든 사람이 있다. 팀에 더 오래 남아 다시 쓰이는 것은 어느 쪽의 결과물인가. 관찰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3개 쪽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3개를 만든 사람은 만들기 전에 "이게 팀에 필요한가"를 먼저 걸렀다. 100개를 만든 사람은 만드는 속도에 집중했고, 거르는 작업은 나중으로 미뤘다. 그런데 "나중"은 보통 오지 않는다. 더 많은 산출물이 계속 쌓이기 때문이다.
팀 안에 "남는 것"이 생기는 경로를 뜯어보면, 만들어진 직후가 아니라 누군가가 골라내고 다듬고 불필요한 것을 버린 이후다. 품질은 생산 속도의 부산물이 아니다. 선택과 폐기의 결과물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AI 도구가 "만드는 것"을 쉽게 해주지만 "고르는 것"과 "버리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에 드는 비용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만들어지는 양이 많아질수록 더 커진다.
물이 든 컵에 모래를 잔뜩 넣으면 처음엔 뿌옇다.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이 과정을 침전이라고 부른다. 팀 안에서 "좋은 것이 남는 과정"도 비슷하다. 만들어진 것들이 충분히 소화되고, 비교되고, 걸러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산 속도만 높이면 컵에 모래를 계속 붓는 것과 같다. 침전이 일어나기 전에 새 모래가 들어온다. 결국 컵 안은 언제나 뿌옇다. 좋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라앉을 시간이 없어서.
이 문제를 처음 접하면, 대부분 "시간 관리"의 문제로 읽는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면 되지 않나." "중요한 것에 집중하면 되지 않나." 맞는 말이지만, 충분하지 않다. 시간 관리는 입력 쪽의 이야기다. 잔존 관리는 출력 쪽의 이야기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달라진다. "오늘 무엇을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 "한 달 뒤에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생산 속도를 늦추라는 뜻이 아니다. 만드는 행위와 고르는 행위를 분리하라는 뜻이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근육을 쓴다. 만드는 것은 빠르게, 많이. 고르는 것은 천천히, 엄격하게. AI 도구는 전자만 빠르게 해줬다. 후자는 우리 몫이다.
팀 단위로 보면 더 선명하다. 팀의 집단 기억은 문서 저장소에 있는 파일 수가 아니라, 팀원들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의 수로 결정된다. 파일이 300개여도 머릿속에 남은 것이 3개라면, 팀의 기억은 3개다. 이 간극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팀의 실제 기억은 저장된 파일 수가 아니라,
팀원들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의 수다.
그러면 "잔존 관리"는 어떤 모습인가. 거창한 시스템이 아니다. 작업 단위가 끝날 때마다 "이 중에서 한 달 뒤에도 쓰일 것은 무엇인가"를 한 번 고르는 것. 나머지는 과감하게 묻어두거나 지우는 것. 만드는 양보다 버리는 양을 더 의식적으로 관리하는 것.
생산량과 잔존량이 분리된다는 관찰을 받아들이면, 몇 가지가 따라온다.
게임 개발 팀 안에서 이 현상은 어디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가. 기획 문서다. 아이디어 노트다. 컨셉 이미지다. AI 도구 덕분에 이것들을 만드는 속도가 빨라졌고, 그 결과 팀 안의 드라이브와 컨플루언스 페이지가 빠르게 채워졌다. 그런데 그 중에서 다음 분기 기획 회의에 실제로 꺼내지는 것은 몇 개인가.
이 맥락에서 TSTF 안에서 한 번쯤 꺼내볼 만한 질문은 몇 가지다.
이 질문들에 당장 답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만들기"만큼 "고르기"와 "버리기"를 의식적으로 대하는 팀과 그렇지 않은 팀 사이의 간극은, AI 도구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 커진다.
만들기만큼
버리기를 의식적으로 설계하는 팀이,
더 오래가는 것들을 만든다.
질문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자.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많이 만들까"가 아니라 — "무엇이 남도록 할 것인가."
이 전환이 생산 속도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AI가 속도를 올려준 덕분에, 우리에게 생긴 새로운 여유는 더 많은 것을 만드는 데 쓸 수도 있고, 무엇을 남길지 더 잘 고르는 데 쓸 수도 있다. 어느 쪽에 쓰느냐가 1년 뒤 팀의 모습을 가른다.
잔존량을 늘리는 방법은 생산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생산과 선택을 분리하는 것이다. AI에게는 "많이, 빠르게"를 맡기고, 사람에게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남겨두는 구조. 그 구조를 의식적으로 만드는 팀이, AI 도구를 가장 잘 쓰는 팀이 될 것이다.
쏟아내는 만큼 남지 않는다. 그러나 고르는 만큼은 남는다.
— Desk γ이번 호의 결론을 당신에게 미룬다. 정해진 답은 없다. 점심 자리에서 한 번쯤 꺼내볼 질문들이다.
그것이 3개라면,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그 3개를 만들기 위해 실제로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어야 했는가.
만들어진 것을 버리는 것이 낭비처럼 느껴지는가, 아니면 필요한 편집 과정처럼 느껴지는가. 팀 문화가 이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더 많이 만드는 데 쓰고 있는가, 더 잘 고르는 데 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 여유가 생겼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가.